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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의 파도소리

-압량벌(押梁伐)의 봄

by 운제산 구름 2023. 1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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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량벌(押梁伐)의 봄

 

겨울의 동장군(冬將軍)이 당당하게 세력을 떨쳤던 때가 바로 어제 같은데 어느 듯 따뜻한 봄이 되었다. 4월 초입(初入)에 접어든 지금, 이 곳 더없이 넓은 압량벌에도 봄의 흔적이 도처(到處)에 널려 있다. 압량은 지금의 영남대학교가 위치해 있는 곳의 지명(地名)이기도 한데, 오래 전 신라시대 때에는 젊은 화랑들이 청운(靑雲)의 이상과 꿈을 가지고 지식과 무예를 연마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유서(由緖)깊은 바로 여기에 대학이 자리를 잡은 것도 큰 교육적 의미가 있지 않을까. 모교가 1947년 개교(開校)이래 지금까지 많은 국가의 인재(人材)들이 수없이 배출하여 명문 사학으로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은 주지(周知)의 사실이다.

 

지금 교정 여기저기에 자리한 수많은 나무에는 새로 돋아난 녹색의 새순들로 인해 온통 녹색의 물결로 넘쳐나고 있는데, 본관 앞쪽과 자연자원대학의 도로 양쪽에 길게 늘어서 있는 벚꽃나무에는 꽃망울이 처녀의 젖가슴마냥 부풀어 있어 정녕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전령(傳令)의 역할을 하고 있는 듯하다. 따스한 봄볕이 드는 지면(地面)에는 연두색의 오랑캐꽃과 노랗게 둥근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민들레들이 집단적으로 모여 있는 모습도 너무나 보기가 좋다. 그리고 도서관으로 이어지는 길에 자리해 굵은 고목(古木)이 되어 하늘높이 치솟아 있는 메타세코이어에도 봄의 기운이 완연(完然)하다. 더구나 축구장 주변에 심어져 지난 가을에 노란 물감을 뿌려놓은 듯 아름다운 가을의 경치를 연출(演出)해 주었던 은행나무에도 녹색의 어린 순들이 옹기종기 가지에 매달려 있는 모습에서도 계절의 변화를 쉽게 느낄 수 있다. 공대 북쪽에 심어진 개나리들은 이미 노란 꽃을 개화(開花)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진정 봄이 왔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교정의 한쪽에 있는 의자에 앉아 오가는 학생들의 모습을 바라보니 지난 시절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 더구나 젊은 남녀대학생의 가벼운 발걸음과 그들의 해맑은 웃음에서도 봄의 향기가 느껴진다. 지난 30년이 넘는 세월은 이곳 캠퍼스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나는 74년에 입학하여 4년간을 이곳에서 보냈는데, 2008년이 된 지금, 지난 시절의 모습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대학의 규모가 거대(巨大)해졌다. 지난 70년대 초에는 황량(荒凉)하기 그지없었는데 이제는 수많은 강의동과 건물들이 들어서 있어 더없이 넓게만 보였던 교정이 이제는 오히려 좁은 듯 여겨진다. 재학중 필자는 학군후보생으로 대학 3,4학년의 2년을 보냈는데 당시 학군단 교육을 받으면서 교정 구석구석을 다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래서 이 곳 캠퍼스가 마치 항상 고향처럼 푸근하게 내 마음에 다가온다.

 

모교(母校)가 이곳에다 터를 잡고 교육을 시작한 것이 지난 70년대 초였다. 40년 가까운 긴 시간이 지났다. 내가 생각하기에는 이 터의 주인은 바로 오래전부터 이곳에 자리를 잡고 무수한 세월의 풍파(風波)를 견디어 온 고목(古木)이라고 생각한다. 교정에 있는 많은 나무들 중에 가장 나이가 많은 나무를 소개한다.

 

 

먼저 공대본관 앞쪽 좌우에 마치 수호신(守護神)처럼 서있는 두 그루의 수양버들이다. 이 나무들은 언제나 이른 봄이 되면 연초록의 가지를 지면으로 길게 향하고 있는데, 그 외양(外樣)이 너무나 인상적(印象的)이다. 수간(樹幹)은 어른의 양쪽 팔를 벌려 닿지 않을 정도의 고목(古木)이 되어 있다. 내가 생각할 때, 수령이 200년은 훨씬 넘어 보인다. 하지만 언제나 자만(自慢)하지 않고 자신의 겸손(謙遜)함을 드러내는 듯, 사방으로 뻗어있는 가지를 지면으로 향하여 한없이 자신을 낮추려고 하는 것 같다. 무더운 여름이면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좋은 대화의 공간을 제공해 주기도 하는데, 지난 40년의 세월동안 얼마나 많은 학생들이 바로 이 나무아래에서 학문과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 수양버들은 바로 공대의 역사인 동시에 압량벌의 주인이라 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듯하다.

 

다음은 여러 그루의 아카시아나무이다. 이들 나무 중 두 그루는 지금의 사범대학동편 잔디밭에 나란히 마주보며 우뚝 서있고, 고목이 된 다른 나무들은 야구장이 있는 입구에 서 있다. 보통 아카시아나무는 이렇게 노목(老木)으로 성장하기 어려운 나무인데, 이들은 운이 좋게도 잘 살아남았다. 아마도 1968년에 이곳에 학교터를 잡고 공사를 할 때, 자연경관의 목적으로 원래 자리한 곳에 그대로 두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니면 공사 관계자들 가운데 아카시아꽃을 좋아하는 분이 계셔서 이 나무들이 훼손(毁損)되는 것을 막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수령이 100년 이상으로 되어 보인다. 나는 종종 이곳을 지나가면서 굵은 수간과 사방으로 가지를 길게 펼치고 있는 모습을 우러러 본다. 매년 5월이면 이들 나무에는 미색의 아카시아꽃이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너무나 보기가 좋고 멀리서 보면 흰 눈이 내린 듯이 꽃으로 가득하다. 무엇보다 아카시아의 향기는 너무나 강해서 멀리서도 그 향기를 맡을 수가 있을 정도이다. 나는 노목이 된 이 아카시아나무들을 정말 좋아한다. 아니 사랑한다. 이제 조금 있으면 올해도 어김없이 이들 나무들은 수많은 꽃을 피워 우리들에게 계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나는 언제나 변함없이 때가 되면 꽃을 피우는 이 아카시아나무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고 수명(壽命)이 다하는 날까지 지금처럼 이 자리를 지켜주었으면 한다.

 

이렇게 조용하게 앉아 지난 대학시절, 노목(老木)이 된 수양버들과 아카시아나무를 바라보니 필자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던 은사님들이 얼굴이 떠오른다. 그리고 이들 은사님들의 지극한 관심과 배려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이 자리에 없었을 것이다. 나에게 영문학(英文學)에 대한 넓은 세계를 펼쳐 보여주셨던 은사님들은 지금은 퇴임하셔서 더 이상 뵈올 수는 없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젊은 시절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미국 자연주의소설가인 Mark Twain(1835-1910)The Adventures of Tom Sawyer, The Adventures of Huckleberry Finn신명(神明)나게 강의하셨던 서인제 은사님, 우렁찬 저음(低音)의 목소리로 눈을 지그시 감고 T. S. Eliot(1988-1965)의 명시(名詩)를 암송(暗誦)하시면서 명쾌(明快)하고 알기 쉽게 설명해 주셨던 이성대 은사님, 17세기의 대표적인 형이상파(形而上派) 시인(詩人)이였던 John Donne(1572-1631)의 시()를 해설해 주었던 장기동 은사님, 낭만주의(浪漫主義) 시인들의 정신적 고뇌(苦惱)에서 나온 영시(英詩)를 해설하시면서 특유의 재치(才致)와 화술(話術), 유머감각(sense of humour)으로 학생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누렸던 권형창 은사님, 선생님께서는 아쉽게도 몇해 전에 소천(召天)하셨다. 영국문학사를 알기 쉽게 강독해 주셨던 김상무 은사님, 우리 학생들에게 영미희곡에 대한 이해와 관심을 갖도록 열성적으로 강의해 주셨던 김욱원 은사님, 특히 선생님께서 강의해주신 미국 극작가인 Arthur Miller(1915-2005)의 작품인 Death of a Salesman(1949)의 수업은 명강의로 정평(正評)이 나있었다. 영어문법에 대하여 정확하고 올바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헌신적(獻身的)으로 강의하셨던 황식모 은사님, 교수님은 필자가 결혼할 때 주례(主禮)를 해주신 분이기도 하다. 영국소설 강의를 하셨던 김상희 은사님과 김상근 은사님, 나의 석사, 박사 학위지도교수였던 이상득 은사님, 그리고 영어음성학에 대한 기초 원리와 개념을 확실하게 심어주셨던 권영규 은사님, 마지막으로 Shakespeare4대 비극(悲劇)을 알기 쉽게 해설(解說)해 주셨던 권세호 은사님들의 모습들이 아련하게 되살아나는 듯하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이들 은사님들의 모습들이 지금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제 이들 은사님들은 모두 오래전에 정년(停年)을 지나 퇴직(退職)하여 또 다른 모습으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계신다. 해당 전공분야에서 최고의 학문적 업적(業績)을 이루셨던 이들 은사님들의 소중한 가르침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으며 필자에게 문학적(文學的)인 소양(素養)과 지식을 갖도록 해주었다. 이 지면(紙面)을 빌어 머리 숙여 감사의 말을 드리고 싶다.

 

얼마 전에 만개(滿開)하여 캠퍼스를 아름답게 해주었던 벚꽃은 며칠 전에 내린 봄비로 인해 백색의 꽃들을 지면(地面)에 모두 떨어뜨려 버렸다. 벚꽃은 내년에 다시 피어나 우리들을 즐겁게 해 주리라 믿는다. 그리고 벚꽃이 떠나간 자리를 5월의 꽃인 아카시아가 채워줄 것이다. 언제나 꽃들은 피었다 너무 빨리 우리들 곁을 떠나버린다. 하지만 그들이 우리들에게 심어준 그 아름다움은 영원히 우리들 가슴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이제 모교는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관 공사를 하고 있다. 기념관의 웅장한 외형(外形)도 중요하지만 이제는 학교의 내실(內實)을 더 튼튼히 다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천지만물이 소생(蘇生)하는 봄이 올해도 어김없이 우리들에게 다가와 우리네 삶에 희망을 주고 계절의 아름다움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나무마다 새로 돋아난 녹색의 잎과 각종 꽃의 잔치가 따스한 봄햇살에 눈이 부시다. 105만평이라는 더없이 넓은 압량벌에 자리한 모교는 언제나 봄이 되면 지금처럼 새로운 생명(生命)들의 탄생(誕生)으로 넘쳐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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