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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의 파도소리

-가을의 문턱에서

by 운제산 구름 2023. 10.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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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문턱에서

 

 

이제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 속에는 옷깃을 여미게 하는 냉기가 담겨져 있다. 얼마 있지 않아 단풍이 들고 얼음이 얼 거라는 생각에 문득 달력을 쳐다보니 이미 추분(秋分)이 지났다. 허나 유난히 태풍과 폭우가 심했던 지난여름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집과 농경지는 폭우로 휩쓸려 폐허가 되어버렸고, 도로와 교량, 그리고 산은 지난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만큼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허탈한 표정은 그들의 삶이 통째로 휩쓸려가고 무너져 내렸다고 말하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보며 인간의 나약함과 자연의 무서움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나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자원봉사자며 수재의연금을 보내오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며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나약한 인간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인정 많은 우리네 사람들을 보면서 한편으로 흐뭇한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답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어쩌면 해마다 거르지 않고 똑같은 일을 연례행사처럼 치러야만 한단 말인가. 이웃 일본만 해도 매년 우리보다 더 심한, 그리고 더 많은 태풍과 폭우를 맞이하지만 그 피해는 우리에 비하면 경미(輕微)하다고 한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가장 큰 가르침은 좌절과 실패로부터 주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좌절과 실패를 잊으면 없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는 해마다 똑같은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반성해야 할 일이다.

 

요즈음 가까이 있는 산과 들판으로 눈을 돌리면 완연한 초가을의 정취를 느끼게 된다. 벼들은 익어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고, 주택가 담장위로는 붉은 석류들이 수줍게 얼굴을 내밀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감나무에는 잘 익은 노란 감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쭉 뻗은 도로변에는 여러 가지 빛깔의 코스모스가 무리를 이루어 그 예쁜 자태로 바람에 춤을 추고 있고, 낮은 산중턱에는 억새풀이 은빛 꽃을 피워 초가을의 맛을 더해 준다. 또한 들판 여기저기에는 늙은 호박들이 따스한 햇살을 받으면서 대지에 누워있는 모습을 볼 때면 가을의 풍요를 절로 느끼게 된다.

 

나는 단풍이 물들 무렵에 가까이 있는 청하(淸河) 보경사(寶鏡寺)로 갈 것이다. 보경사는 그 이름처럼 나에게 보석 거울을 보여줄 것이다. 사찰 입구에 무리를 이루고 있는 늙은 느티나무의 붉은 잎이나, 절 뒤쪽의 2정도의 등산로를 따라 가면서 계곡 곳곳에 산재해있는 물웅덩이에 떨어져 있는 낙엽들을 바라다보며 나는 흐르는 세월의 아름다움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생전(生前)에 보경사의 가을경치와 노거수(老巨樹)들을 바라보면서 주옥같은 수필을 남기신 한흑구(韓黑鷗)선생님(1909-1979)의 시비(詩碑)도 찾아보려 한다. 그러면 어느 듯 가을이 되어 있는 나 자신을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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