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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의 파도소리

-환성산(環城山)과 불굴사(佛窟寺)

by 운제산 구름 2023. 10.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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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성산(環城山)과 불굴사(佛窟寺)

 

경산에서 팔공산이 있는 방향으로 눈길을 돌리면 제일 먼저 보이는 것은 바로 하양에서 대구 방면으로 길게 이어져 산맥(山脈)을 형성하고 있는 산들이다. 이들 산중 가장 높은 산이 해발 656m인 낙타봉이고 그 다음으로 높은 산이 초례봉인데, 지난 봄학기에 평소 잘 알고 지내고 있는 대학 동문인 K선생의 안내로 이 두 봉을 오른 적이 있다. 당시에 시간이 넉넉했더라면 이 들 두 봉보다 훨씬 높은 환성산(해발 811m)까지 등반을 할 수 있었지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였다. 팔공산의 동봉, 서봉 다음으로 높은 이 산은 많은 이들이 오르고 있는 산으로 필자도 꼭 한 번 오르고 싶었는데, 온통 붉은 단풍으로 물든 만추(晩秋)의 지금 시절 인연이 도래하여 마침내 환성산 산행을 하게 되었다.

 

내가 환성산을 오르기 위해 선택한 등산로의 방향은 지방도인 하양과 와촌을 지나 갓바위로 들어가는 교차로에서 좌회전 하면 바로 신라천년고찰인 불굴사(佛窟寺)로 들어가는 길이 나오는데, 이 사찰의 뒤쪽으로 나있는 능선(稜線)을 따라 길게 이어지는 산행로를 택하였다. 산행길은 떨어진 낙엽으로 인하여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자국에 느껴지는 낙엽의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와 산행을 한결 편하게 해주었다. 2시간 이상을 길게 이어진 능선(稜線)을 걸은 뒤 앞을 바라보니 환성산의 높은 봉우리가 눈앞에 다가왔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능선이었는데, 이제부터는 오르막이 계속 이어지는 가장 힘든 구간(區間)이라 생각하면서 앞으로 계속 전진하였다. 끝없이 길게 이어지는 오르막에 나는 거칠어지는 호흡을 고르기 위해 몇 차례 휴식을 취하면서 가을 산의 아름다움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이 산의 또 다른 이름은 감투봉이라 부른다. 정상의 바위에 세워둔 조그만 표석(表石)에는 산의 높이와 봉의 이름이 새겨져 있어 산에 대한 정보를 알려준다. 정상에 올라 눈길을 팔공산 쪽으로 돌리니 동봉과 서봉이 손에 잡힐 듯 하고 좀 더 가까이 있는 갓바위 부처님이 있는 봉이 바로 지척(咫尺)이다. 경산 쪽으로 바라보니 지난 봄에 올랐던 낙타봉과 초례봉이 어서 오라고 반갑게 손짓을 하는 듯하다. 정상에는 온갖 형상을 한 바위들이 무리를 이루고 있어 이들 바위에 서서 발아래로 펼쳐져 있는 붉은 단풍으로 가득한 산들을 바라보는 것은 더없이 큰 즐거움 이였다 . 정상 한쪽에는 통신탑이 만들어져 있는데, 제대로 관리되지 않아 주위 경관을 오히려 해치고 있는 듯 보였다. 책임부서는 대구시 동구로 되어있는데, 철거(撤去)하던지 깨끗이 보수(補修)를 하던지 손길이 필요하다. 자연은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가장 좋다는 것을 우리들은 명심(銘心)해야 한다. 자연에 인간들의 손이 닿게 되면 바로 그날부터 오염, 훼손되는 경우를 우리는 자주 보게 되지 않은가. 그토록 오르고 싶었던 환성산 정상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니 산행시의 힘들었던 생각들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환희감에 가슴이 벅차오른다. 앞으로도 시간이 나면 자주 오르리라 다짐을 하면서 하산(下山)하였다.

 

환성산 자락에는 신라천년고찰인 불굴사가 있는데 이 사찰은 산중턱에 위치하여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귀중한 보물이 있고 신라 때 원효대사께서 수행하신 굴이 있으며 더구나 김유신 장군께서도 여기에서 삼국통일의 염원(念願)을 기원(祈願)했던 신령(神靈)한 곳으로 알려져 있어 소개하고자 한다. 이 절의 유래(由來)는 다음과 같다.

 

신라 문무왕 10(690)에 창건되었고 흥성기(興盛期)에는 물레방아를 갖추고 쌀을 찧어 승려와 신도들의 공양미를 보시(布施)한 대찰(大刹)이었다고 전해온다. 영조 12(1736)에 큰 비로 인한 산사태로 대파(大破)되어 퇴락하였는데, 그 후 전라도 송광사에 있던 노()스님이 현몽(現夢)을 받아 이곳에 와서 중건(重建)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한다. 사찰 경내에는 신라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3층 석탑(石塔), 석조입불상(石造立佛像), 그리고 부도(浮屠) 등이 있다. 이곳에는 불굴사가 창건되기 전에 원효대사가 수도한 석굴이 있는데, 이를 원효암 혹은 불굴암 이라 부르고 있으며, 이 석굴에서 젊은 김유신 장군이 삼국통일을 염원하여 기도한 곳으로도 전해지고 있다. 석굴 바위틈에서 나오는 약수는 지난 시절 원효스님과 김유신 장군이 음용(飮用)했던 물이며, 이 약수는 소화에도 특효가 있고 특히 신장염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불굴사로 들어가는 산길은 포장이 잘 되어 있어 왕래(往來)하는 데는 편리하다. 만추(晩秋)인 지금 도로 좌우에는 가을의 전령사(傳令使)인 억새풀이 솜털같이 하얀 꽃을 피워 사찰을 찾는 불자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느끼게 해주며, 군데군데 심어진 탱자나무에도 잘 익은 노란 열매가 달려 있고 숲 여기, 저기에 곧게 자란 잣나무들이 마치 부대를 사열(査閱)하듯 질서정연(秩序整然)하게 서서 청정(淸淨)한 가을 숲의 향기를 뿜어주고 있었다.

 

이 사찰은 규모가 큰 대찰은 아니지만 경내가 깨끗하고 유구(悠久)한 역사를 간직한 사찰의 면모(面貌)가 살아 있다.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중심으로 하여 좌측에는 석불입상을 모신 약사보전(藥師寶殿), 우측에는 종무소가 자리하고 있고, 종무소 아래로는 요사체가 반듯하게 서있다. 적멸보궁 앞에는 보물 제 429호로 지정된 불굴사 3층 석탑이 단아(端雅)한 모습으로 불자들을 반갑게 맞이하고 있고, 사찰 경내에는 고목이 된 은행나무들이 당당하게 서있으며, 더구나 사찰 입구와 적멸보궁 뒤에는 대숲이 무리를 이루어 자라고 있어 한결 고찰(古刹)의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필자가 보기에 약사보전에 모셔 놓은 석조입불상(石造立佛像)은 일반 사찰에서 볼 수 없는 특별한 불상(佛像)이라고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여기에 모셔진 석불입상은 화강암의 바위에 받침대를 조각하고 그 위에 불상을 세운 형태로 높이 2.3m, 어깨넓이 75cm, 머리높이 53cm 이다. 얼굴 부분은 훼손이 심하여 이목구비(耳目口鼻)를 조각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불상의 조성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몸에 비해 머리를 크게 하여 등신비율(等身比率) 이 비현실적인 기법으로 표현되어 있다. 머리에는 굵고, 둥근 육계(六界)가 있으며 머리 모양은 특별한 장식(裝飾)없는 민머리 형태이다.(설명문에서)

 

이 석조입불상은 갓바위 관봉석조여래좌상의 아내였다는 설()이 전해져 오고 있는데, 그 외형(外形)과 내력(來歷)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석불입상은 갓바위 약사불과 같은 시대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되며 갓바위 약사불은 갓을 쓴 남성상의 모습임에 반해 불굴사 약사불은 족두리를 쓴 여성상의 모습을 하고 있어 어머니와 같은 자비로 중생을 제도한다 하여 부부라는 설화도 전해온다. 지리적으로 갓바위 부처님과 불굴사 부처님 중간지역 지명이 음양동인데 불굴사쪽은 음지(陰地)이며, 갓바위쪽은 양지(陽地)인 것으로 보아 음양(陰陽)의 이치에 맞게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설명문에서)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불굴사는 신라시대 때 원효스님께서 석굴에서 수행정진 했으며 김유신 장군도 삼국통일의 소원을 기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소원성취 기도도량임을 알 수 있다. 지금도 신심(信心) 깊은 불자들이 많이 찾아와 기도(祈禱)와 정진(精進)을 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본 불굴사는 산중턱의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전망이 좋을 뿐만 아니라 숲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어 언제나 맑고, 청정한 공기를 마음껏 호흡할 수 있는 좋은 곳이다. 사계절(四季節) 내내 숲으로 둘러 싸여 있는 불굴사는 세속사(世俗事)에 지친 사람들에게는 심신(心身)의 피로(疲勞)를 일순간에 녹여버릴 수 있는 좋은 휴식처가 될 뿐만 아니라, 마음의 번뇌(煩惱)를 해소(解消)하고 명상(瞑想)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더 없는 좋은 곳이라 할 수 있다. 혹여 시간적 여유가 있으면 절 입구에 자리한 전통찻집인 불다원(佛茶園)”에서 차를 마시며 산사(山寺)의 여유를 느낄 수도 있다. 언제나 변함없이 하늘 높이 우뚝 솟아있는 환성산 가을 산행과 고찰 불굴사에 대한 추억은 오래 동안 내 마음에 남아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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