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일만의 파도소리

-운제산(雲梯山) 오어사(吾魚寺) 그리고 오어지(吾魚池)

by 운제산 구름 2023. 10. 3.
728x90
SMALL

 

 

 

 

 

-운제산(雲梯山) 오어사(吾魚寺) 그리고 오어지(吾魚池)

 

신라(新羅)시대이래로 운제산 자락에 터를 잡은 천년 고찰(古刹) 오어사는 나의 선친(先親)과 각별한 인연이 있다. 그 인연은 다름아닌 선친께서 어린 나이로 스님이 되기 위해 바로 이 곳 오어사로 출가(出家)한 큰 인연이다. 출가를 결심한 선친께서는 오어사로부터 40km정도 떨어져 있는 고향인 영일군 동해면 마산리에서 나의 조모님, 삼촌들과 이별하고 이 사찰까지 왔던 것이다. 당시 출가를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선친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그리고 어린 나이에 그 먼거리를 걸어가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돌아가신 조모님께서 생전(生前)에 필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 기억이 있다. 나의 조부님께서 갑자기 돌아가시게 되자, 장남(長男)인 선친께서 생계(生計)를 책임지는 가장(家長)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래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면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선친의 고향인 마산리는 조그만 어촌이었다. 선친께서는 고기를 잡기위해 어선을 타는 일부터 시작하여, 마을 근처에 있는 언덕에 올라가 밭을 일구어 곡식을 심기도 하였고, 가을에는 감을 따서 팔기도 하였다. 아무리 힘들고, 궂은 일이라도 돈이 되는 일이라면 기꺼이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는 일념(一念)으로 열심히 일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선친께서 도모한 모든 일들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경우가 드물었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일을 할 때마다 몸을 다치는 일이 빈번하게 발생하였다. 자식의 이러한 모습을 곁에서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면서 지켜본 조모님은 답답한 마음에 주변에서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아가 아들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묻게 되었다. 선친의 생년월일을 들은 무속인은 뜻밖의 말을 하였다. 즉 선친은 스님이 될 팔자를 타고났다는 청천벽력(靑天霹靂)같은 말을 듣게 된 것이다. 그 후 아들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고 계셨던 조모님은 어느 날 아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너가 몸을 다쳐 불구자(不具者)로 살기보다는 차라리 불가(佛家)에 입문하여 불제자(佛弟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

 

어린 나이에 어머니로부터 불교에 귀의(歸依)하라는 뜻밖의 말을 들은 선친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그 후 선친께서는 아마도 자신의 장래에 대해 많은 번민(煩悶)의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여러 가지 복잡한 우여곡절(迂餘曲折)의 과정을 거친 후, 어머니의 뜻대로 출가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곧 바로 간단한 짐을 지고 오어사로 발길을 향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춘기에 막 접어든 15살의 선친이 그 동안 정들었던 집안 식구들과 고향을 등지고 출가의 길을 선택한 그 심정(心情)은 또 어떠했을까? 아마도 새로운 삶에 대한 두려움과 남은 가족들에 대한 걱정등 만감(萬感)이 교차하지 않았을까?

 

8월 중순이 막 지난 지금 나는 오어지가 한 눈에 들어오는 그늘에 앉아서 출가할 당시의 선친의 모습을 어렴풋이 떠올려 보았다. 그 때도 지금처럼 짙은 녹음과 맑은 계곡물, 더없이 넓은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 그리고 여기, 저기 나무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매미소리가 이 넓은 운제산 자락을 변함없이 지켜보고 있었으리라. 하여간, 선친께서는 오어사로 출가하여 기림사(祇林寺)에서 정식 스님이 되는 도첩(度牒)을 받은 후, 지난 198612월 세수(歲壽) 67세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50년이 넘는 세월을 부처님을 섬기며 지내오셨다. 처음 입산(入山)한 오어사를 비롯하여 월성군에 있는 기림사, 경주의 분황사, 포항의 죽림사, 그리고 선친께서 직접 부지(敷地)를 마련하여 창건하신 포항시 용흥동 운흥사등에서 수많은 중생(衆生)들에게 바른 불법(佛法)을 전달하기위해 노력하셨다. 내가 소년기, 청년기을 보낸 운흥사는 선친이 지병(持病)으로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셨던 마지막 사찰이 되었다. 선친께서는 출가후 나의 모친인 월성 김씨를 만나기 전까지는 조계종(曹溪宗) 비구승(比丘僧)으로 계시다가 한국불교정화운동인 법난(法難)사건이 일어난 직후에 대처승(帶妻僧)으로 승적(僧籍)을 옮기고 태고종단(太古宗團)에 소속되어 계셨다. 2006년 올해는 선친께서 돌아가신지 20주기가 되는 해이다. 선친께서 이 세상을 떠난지 어언 20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생전(生前)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오어사와 오어지 주변은 경치가 너무나 아름답다. 언제나 맑고, 푸른 오어지, 오어사를 감싸고 있는 운제산과 울창한 숲, 원효암(元曉庵) 계곡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한 폭의 풍경화(風景畵)처럼 빼어난 경치을 자랑하는 자장암(慈藏庵)등이 변함없이 이 곳을 찾는 모든 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준다. 더구나 오어사는 많은 고승(高僧)들이 수행처修行處)로 삼은 것으로 유명한데, 원효(元曉)스님을 비롯하여 자장(慈藏)스님, 원효스님과 서로의 법력(法力)을 시험했다는 혜공(惠公)스님, 그리고 의상(義湘)스님등이 주석(主席)했던 사찰로 유명하다. 이 역사깊은 도량(道場)에서 선친께서는 7년의 기간동안(1946.11-1953) 주지(住持)로 계시면서 많은 불사(佛事)를 이루셨다. 오어사 대웅전(大雄殿)은 옛날 그대로인데 지금 선친의 모습은 도량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

 

운제산 오어사 그리고 오어지는 실과 바늘처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무수한 시간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우리들 곁에 있다. 더구나 천년고찰인 오어사에는 많은 관광객들과 신심(信心)깊은 불자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으며, 오어지의 맑고, 푸른 물속에는 붉은 빛깔의 잉어와 고개를 비쭉 내밀고 방문객들을 반기는 자라들을 보노라면 평화롭고 아늑한 자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준다. 우리네 인간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때가 되면 이 세상과 사별(死別)하게 된다. 하지만 옛날의 고승(高僧)들은 깨달음을 통한 높은 법력(法力)으로 한결같이 생사(生死)를 자유로이 넘나들었다고 하지 않은가. 원효스님은 치열한 구도(求道) 노력을 통해 一切無碍人(일체무애인) 一道出生死(일도출생사)” 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한다. 지금 이 순간 원효대사가 환생(還生)하여 운제산 정상에 떠있는 흰구름을 타고 무애가(無碍歌)를 부르면서 나타날 것만 같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