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영일만의 파도소리

-연화재를 오가며

by 운제산 구름 2023. 10. 2.
728x90
SMALL

 

 

 

 

-연화재를 오가며

 

 

지금의 포항시 북구에 속해 있는 용흥동(龍興洞)이 지난 60년대에는 모든 주민들이 힘들게 생계를 꾸려가야만 되는 가난하기 그지없는 동네였다. 당시 모든 집들은 야트막한 산자락을 따라 널판자나 볏짚으로 지붕을 올린 빈민촌이였다. 상전벽해(桑田碧海)라 했던가?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그 당시에 산과 산사이에 있었던 논과 밭들은 모두 택지로 바뀌어 고층아파트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등학교에 다녔던 어린 시절에 나는 동네 친구들과 함께 논두렁 여기 저기서 메뚜기를 잡기도 하였고, 비가 온 뒤에는 대바구니와 통을 들고 붕어며, 미꾸라지를 잡으려고 수초(水草)로 뒤덮인 실개천으로 뛰어들었던 일들이 자주 있었다. 이제는 지나가 버린 과거의 추억이 되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용흥동은 지형적으로 대왕골, 감실골이라 불리어 지고 있는 두 지역을 합쳐서 이름하는데, 새로 이곳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 골짜기의 이름도 잘 모르고 있는 이가 많다. 현재 우방아파트가 밀집해 있는 지역이 대왕골이고 동해의료원이 있는 곳이 감실골이다. 이 두 골짜기 사이에는 탑산이 위치해 있는 데, 이곳은 6. 25전쟁때 산화(散華)한 학도의용군들의 혼백(魂魄)을 모셔 놓은 충혼탑(忠魂塔)이 있는 산으로서 매년 6월에는 이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위령제(慰靈祭)를 올리는 성스러운 장소로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용흥동 북쪽으로 해발 100m 정도의 연화재가 있는데, 이 곳은 포항에서 기계, 죽장, 청송으로 이어지는 31번 국도의 진입로이기도 하다. 이 도로는 얼마전 4차선으로 깨끗이 포장되어 시민들에게 편리함을 제공하고 있지만,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흙먼지와 자갈투성이의 비포장 도로로 불편하기 그지없는 시골길이였다. 그리고 이 주변은 당시 공동묘지가 있어 온 산이 묘지로 가득하였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묘지들이 그대로 남아 있어 을씨년스러운 모습을 보여준다. 이 연화봉정상 도로 한편에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끄는 비석(碑石)이 외롭게 자리하고 있다. 이 비는 199012월에 건립된 신라소재상부인순절비(新羅蘇宰相夫人殉節碑)로 저 멀리 동해를 향해 바라보고 있다. 간단히 그 내력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때 조정에는 소랑(蘇郞)이라는 덕망이 높고 청렴결백(淸廉潔白)한 대신(大臣)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은 해룡(海龍)도 탐냈다는 수로부인(水路夫人)에 견줄만한 빼어난 미모와 부덕(婦德)을 겸비한 절세(絶世)의 미인으로 서라벌에 소문이 자자하였다고 한다. 이 소문을 들은 왕은 소랑부인의 아름다운 자태를 보자 마음이 끌렸고, 왕은 부군인 소랑을 일본 통신사로 임명하여 일본으로 보낸 후, 수차례 부인을 회유(懷柔)하였지만 끝내 부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에 분노(憤怒)한 왕이 부인을 타지방으로 추방하게 되자, 부인은 소랑이 애지중지(愛之重之)한 말과 개를 데리고 이곳 연화봉 정상에서 움막을 짓고 남편을 기다렸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 소랑은 통신사의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바다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러나 부인은 죽는 날까지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에 담고 정절(貞節)을 지켰다고 전한다. 그 후 세월이 지나면서 후세 사람들이 망부사(望夫詞)를 지어 소랑부인(蘇郞夫人)의 혼백(魂魄)을 위로하였고, 조선 세조때 한 암행어사가 부인의 애틋한 넋을 기리기 위해 읊은 시가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

 

顒望臨碧空 멀리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怨情感離別 이별한 낭군만 그리워 할세

江草不知愁 강가의 푸른 풀이 야속하구나

巖花相爭發 바위의 꽃은 다투어 피건만

雲山萬里隔 산과 구름이 만리길을 막아

音信千里絶 님의 소식이 영영 끊어졌구나

春去秋後來 봄이가고 다시 가을이 오건만

相思幾時歌 아니오는 님생각 언제 풀릴까

 

위의 내용에서처럼 부인의 슬픈 사연이 담겨있는 연화봉은 또한 망부산(望夫山)이라고도 불리어 지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소재상 부인이 연화봉 정상에서 남편을 그리워하면서 그의 무사귀환(無事歸還)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한데서 유래한다. 이처럼 자신의 신변(身邊)에 다가온 유혹을 물리치고 끝까지 수절(守節)하면서 남편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는 이 비()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남녀지간, 특히 부부간에 지켜야 하는 도덕적 윤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소재상 부인의 애절한 사연이 담겨있는 순절비(殉節碑)를 바라보며 연화재를 오른다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