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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일만의 파도소리

-비학산(飛鶴山)과 법광사지(法廣寺址)

by 운제산 구름 2023. 10.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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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학산(飛鶴山)과 법광사지(法廣寺址)

 

경북 포항시 북구 신광면 상읍리에 있는 해발 762m의 비학산은 넓은 신광 벌판위로 학()이 하늘로 날아오르는 형상에서 그 이름을 비학산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먼 옛날부터 이 지역에는 학이 많이 서식(棲息)했다고 하며 지금도 학이 둥지를 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 산 정상 동편 중턱에 있는 작은 봉우리를 등잔혈이라고 하는데 주민들에 의하면, 여기에 묘를 쓰면 자손이 번창한다는 속설(俗說)이 전해온다고 하고 여름철에 가뭄이 극심(極甚)할 때면 주민들의 뜻을 모아 비학산 아래에 있는 무제등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기도 했다는 것이다.

 

비학산은 내연산 향로봉 다음으로 이 지역에서 높은 산으로 요즈음은 많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정상을 오르는 산행길은 여러 경로가 있지만 나는 법광사 뒤쪽으로 나있는 길을 좋아한다. 산행 초입(初入)부터 이어지는 울창한 숲과 맑은 물이 끊임없이 흐르는 계곡을 따라 걸어가면, 하늘을 가리고 있는 숲이 만들어주는 시원한 그늘 길이 정상(頂上)까지 이어져 있어 산행을 쾌적하게 해 준다. 더구나 숲속 곳곳에서 산새들이 둥지를 틀고 그들 특유의 맑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어 진정 산이 그들의 안락한 보금자리임을 일깨워준다. 4-5부 능선부터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시작되는데, 산행의 도움을 주기위해 산을 좋아하는 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지주(支柱)를 세우고 밧줄을 매달아 놓았다. 이 오르막을 통과하면 비교적 완만한 경사가 이어지기 때문에 오르막을 오를 때 힘들었던 숨소리가 다소 안정을 되찾는다. 7-8부 능선에 가까워지면 고목(古木)이 된 소나무와 6월말인 지금 연분홍 빛깔로 수많은 꽃을 피운 싸리나무 군락(群落)을 통과하게 되는데, 나는 무리를 지어 피어난 싸리나무 꽃이 너무나 아름다워 휴대폰으로 찍어 두었다. 정상에서 느끼는 환희와 즐거움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힘든 산행의 과정(過程) 없이는 정상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 아니던가? 내 경우도 등산 중에 종종 중도(中途)에서 포기하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정상에서 느끼는 기쁨이 크다는 것을 평소 산행을 통해 알고 있기에 끝까지 오르는 것이다. 산 정상에는 비상시 헬기가 착륙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두었고 여기가 정상임을 알려주는 표석(標石)과 함께 산행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나는 여기에 서서 산 아래에 펼쳐져 있는 넓은 신광벌판을 바라보고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동해 바다를 바라보니 내 작은 가슴이 더없이 넓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방(四方)을 둘러보니 짙은 녹색의 옷을 입고 있는 산, , 산이다.

 

최근에는 이 곳 비학산을 청정하게 유지, 보존하기위한 숲 탐방운동이 전개되고 있다고 한다. “생명의 숲이라는 단체가 녹색 자금을 지원받아 추진하고 있는 이 운동은 무분별한 등산 활동으로 인하여 훼손된 숲을 복원(復元)하는 일을 주로 전담하고 있다. 더구나 자연친화적인 숲 탐방운동을 통하여 올바른 산행 문화를 유도해 나가는 일도 병행하고 있어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 비학산아래에 있는 상읍리에는 신라천년고찰(新羅千年古刹)이었던 법광사지가 있는데, 옛날의 웅장했던 가람(伽藍)의 모습은 사라지고 그 흔적만 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지난 시절의 법광사는 다음과 같은 역사(歷史)를 지니고 있다.

 

이 사찰(寺刹)은 신라 제 24대 진흥왕 10년에 중국 양()나라 무제(武帝)때 석가불진신사리 22()를 신라국에 보내와서 26대 진평왕(재위기간; 서기579-631) 당시에 법광사를 창건하고 사리탑을 세워 사리(舍利)를 봉안(奉安)하고 대웅전 금당이층과 525간의 당자(堂子)가 있는 대사찰(大寺刹)이였으며 진평왕 원당(願堂)을 세워 왕께서 생전(生前)은 물론 사후(死後)에도 불교에 귀의(歸依)할 것을 서원한 원찰(願刹)이었다. 그 후 조선 철종(재위기간; 서기 1849-1863)때에 화재로 불타 폐사(廢寺)되었고 서기 1936년 병자년에 벽허당(碧虛堂) 장눌선사(蔣訥禪師)께서 현재의 법광사를 재건(再建)하였다고 한다. 현재 구법광사지에는 불사리함을 포함하여 사리탑중수비, 불상(佛像), 연화문불상대좌, 쌍거북비석대좌, 석등(石燈), 배례석(拜禮石), 당간지주(幢竿支柱), 주초석(柱礎石)등 많은 유물이 있어 과거 찬란했던 불교의 대성지(大聖地)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이 지난 시절의 법광사와 비학산의 숲과 계곡에 대해 지은 시()가 오늘까지 전해지고 있는데, 이 시는 절 입구에 세워진 표석(標石)에 새겨져 있다

 

古壁丹靑剝(고벽단청박) 옛 벽의 단청은 떨어져 나가고

經營歲月深(경영세월심) 흘러간 세월 오래기도 하구나

鳥啼人正靜(조제인정정) 새는 지저귀나 사람은 고요한데

花落葉成陰(화락엽성음) 꽃은 지고 잎은 그늘을 이루고

芳草沿階綠(방초연계록) 향기로운 풀은 섬돌을 따라 짙고

淸風入樹陰(청풍입수음) 맑은 바람이 나무 그늘에 불어오니

別峯啼謝豹(별봉제사표) 외진 봉우리에서 울부짖는 표범소리에

忽起故山心(홀기고산심) 문득 옛 동산의 마음을 생각나게 하노라

 

비학산 아래에 있는 지금의 법광사는 큰 사찰은 아니다. 하지만 절 주변에는 옛 시절에 대찰(大刹)이 있었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여기를 방문하는 불자(佛子)들을 제일 먼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은 사찰 여기, 저기의 넓은 항아리에 심어둔 수련(水蓮)들이다. 깨끗하고 소담스러운 연꽃은 우리 모두에게 세속(世俗)에 물들지 말고 언제나 부처님이 말씀하신 법()대로 살라고 무언(無言)의 진리(眞理)를 깨우쳐준다. 경내에 들어서면 좌측에는 고목(古木)이 된 벚나무가 줄지어 서있고 석탑(石塔)이 안뜰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삼존불(三尊佛)을 모신 원통전(圓通殿)이 하늘 높이 솟아있는 비학산 쪽을 향하고 있으며, 산령각(山靈閣), 요사(寮舍) 그리고 종무소등이 질서 정연하게 자리하고 있다. 신라 때의 화려하고 웅장했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으니 다만 세월이 무상(無常)할 따름이다. 법광사지는 상읍리 마을 가장 안쪽에 위치해 있고 진입(進入)하는 도로의 노폭이 좁아 차량이 다니기에는 불편하다. 더구나 사찰로 들어가는 길은 이 곳 주민들의 농로(農路)로 이용되고 있어 항상 사고의 위험이 높다. 하지만 이 곳 비학산 기슭에 있는 법광사지에는 통일신라의 고색창연(古色蒼然)한 불사리탑(佛舍利塔)이 모셔져 있으며 유구(悠久)한 옛 신라의 역사가 서려있는 성지(聖地)로 만중생(萬衆生)의 안온한 귀의처(歸依處)가 되고 있음은 더없이 값진 유산(遺産)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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