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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사랑

-선친(先親)을 생각하며

by 운제산 구름 2024. 6.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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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부모님

-선친(先親)을 생각하며

 

 

나의 유년 시절은 보통의 아이들과는 다르게 사찰이라는 경건한 분위기에서 성장하였다. 그 당시 선친께서 매일 이른 새벽에 법당에서 부처님전에 불공을 드리는 일이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이루어졌다. 조용하기만 하던 새벽의 정적을 깨트리는 타종소리와 독경소리를 듣고 달콤한 잠에서 나는 깨어나곤 하였다. 그리고 가족 모두는 커다란 빗자루를 하나씩 들고 사찰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낙엽과 지저분한 오물들을 쓸어내는 것이 매일 아침의 일과가 되었다. 달콤하기만 했던 새벽잠에서 깨어나는 일도 힘든 일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일 사찰경내를 청소하는 일도 무척 짜증스러웠던 일로 내 머리 속에 남아있다. 그러나 선친이 돌아가시고 난 지금 그 때의 일을 회상해 보니 잊지 못할 아름다운 추억으로 내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고 있다.

 

돌이켜보면 선친께서는 지난 8612월 함박눈이 많이 내린 추운 어느 겨울날 지병(持病)으로 67세의 나이로 이 세상을 하직하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많은 연세가 드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생전의 선친께서는 겉으로는 건강한 체구를 하고 계셨지만, 속으로는 내과성 질환을 앓고 계셨던 것이다. 당신의 몸의 상태가 평소와는 다름을 깨닫고 곧 바로 종합병원에 입원한 후, 여러 가지 검사를 받고, 외과 수술이 이어지고, 2주간의 시간이 지나면서도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병세가 더욱 악화되면서 더 이상의 의료진의 도움도 속수무책(束手無策)이 되어 버리고 그렇게 선친께서는 이 세상에서의 길지 않는 삶을 마감하셨다.

 

선친께서는 1920625(음력)에 경북 영일군 동해면에서 장자(長子)로 출생하셨다. 조그만 어촌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것이다. 나의 조부님이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에 선친께서는 어린 나이에 가정을 책임져야하는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떠맡게 되셨다. 그래서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배를 타고 고기를 잡기도 하고, 돈벌이가 되는 일이면 아무리 힘든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더구나 열심히 노력한 만큼 모든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지는 일이 드물었고 항상 고통과 시련이 선친에게 다가왔다고 한다. 돌아가신 조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당시 선친께서는 많은 일을 도모하였지만, 번번이 실패로 이어지는가 하면, 심지어 몸을 다치는 불상사(不祥事)가 빈번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조모님께서는 혹여 자식을 잃게 될까봐 노심초사(勞心焦思)하게 되었고, 답답한 심정에 주변에 용하다는 무당에게 선친의 사주팔자(四柱八字)를 물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선친의 사주는 스님이 될 운명을 타고났다는 뜻밖의 말을 듣고 조모님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조모님께서는 며칠 뒤에 아들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네가 몸을 다쳐 불구의 몸이 되는 것보다 불가(佛家)에 입문하여 불제자(佛弟子)가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선친께서는 여러 가지 번민(煩悶)과 우여곡절(迂餘曲折)의 시간을 보낸 후, 출가(出家)하기로 마음을 정하고 15세 되던 해에 고향에서 40km 떨어져 있는 오어사(吾魚寺)에 들어가서 스님의 길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후 19세 때에는 일본으로 건너가 6년 동안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후, 경북 월성군에 있는 기림사(祈林寺)에서 정식 스님이 되는 도첩(度牒)을 받고 승려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 후 1946년에서 1953년까지 오어사 주지로 계시면서 많은 불사(佛事)를 이루셨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노후화된 오어사 대웅전을 중수(重修)하셨고 말사(末寺)인 원효암(元曉庵)이 한 신도(信徒)의 실화(失火)로 소실된 것을 복구하기도 하였다. 그 후 1955년에는 포항시에 있는 죽림사(竹林寺) 주지로 계시면서 신도들에게 불법을 널리 알리는 일에 당신의 온 열정을 쏟으셨다. 그리고 이 시기에 용흥동에 부지(敷地)를 마련하여 운흥사(雲興寺)를 신축하여 돌아가시기 전까지 주지로 봉직하면서 많은 불제자들에게 불교의 자비정신을 심어주려고 노력하셨다. 선친께서는 출가할 당시에는 조계종 승려로 불가에 입문하였으나, 한국불교정화운동으로 인한 법란(法亂)을 계기로 대처승(帶妻僧)으로 승적(僧籍)을 옮겨 태고종(太古宗)에 승적(僧籍)을 두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모님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셨고, 1년 뒤에 선친께서 입적(入寂)하셨으니 모자(母子)간에 고통 없는 극락세계에서 반갑게 해후(邂逅)하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두 분 모두 어려운 시절에 이 사바세계에 오셔서 힘든 삶을 사시다가 돌아가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들은 흔히 생사(生死)를 구름이나 이슬에 비유하곤 한다. 인생무상(人生無常)이라고 했던가? 지금 이 순간 나는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해 준 두 분이 그립다. 보고 싶다. 조모님, 아버님, 저는 오늘 당신들이 그립습니다. 과거에 어려웠던 모든 일들을 다 떨쳐버리시고 이제는 고통 없는 극락세계에서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이 불초소생(不肖小生)이 엎드려 빕니다

 

 

 

 

-2019년은 선친께서 출생하신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렇게 많은 연세가 아닌 67세에 지병(持病)으로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너무나 허무한 생각이 든다. 아버님 수명이 너무나 짧아 자식으로 제대로 효도(孝道)를 하지도 못한 것이 죄송할 뿐이다.

 

 

 

지난 198612월에 열반(涅槃)에 드신 선친(先親)의 생전년보(生前年普)는 아래와 같다.

 

대종사(大宗師) 심우당(尋牛堂) 강정득(姜貞得) 화상(和尙) 년보(年譜)

 

-1920.6.25(음력); 경북 영일군 동해면 입암동 77번지에서 진주후인(晋州后人) 강성봉(姜聖鳳)과 달성후인(達城后人) 서강련(徐江連)의 장자(長子)로 출생

-1935-1939; 15세에 경북 영일군 오어사(吾魚寺)로 출가(出家)하여 은법사(恩法師) 이무수(李務守) 화상(和尙)과 법사(法師) 최형찬(催亨讚) 화상(和尙)을 모시고 수계(受戒) 후 오어사 공비생(公費生)으로 기림사(祇林寺) 강원(講院)에서 수학(修學)

-1939-1945; 19세에 일본(日本)으로 건너가 6년간 수학후 귀국

-1945-1946.11.15; 경북 월성군 기림사에서 임진규(林陳奎) 화상의 사도제로서 조선불교 교헌 제69조의 자격을 구비하여 도첩(度牒)을 받음.

-1946.11-1953; 경북 영일군 오어사 주지(住持)7년간 근무

이 기간중에 대웅전(大雄殿) 13간을 중수(重修)하였고 예하말사(隸下末寺)인 원효암(元曉唵)이 실화(失火)로 소실(燒失)된 것을 복구불사(復舊佛事)하여 110간을 중건(重建)

-1951.10.16; 3회 법계고시(法階考試)에서 4급 법계중덕과(法階中德科)에 합격하여 법계증서 취득(取得)

-1952.1.8; 경북 월성군 기림사에서 감찰(監察)로 근무

-1955.4.22-1956.2; 포항시 죽림사(竹林寺)에서 주지(住持)로 근무

-1956.2-1986.11; 경북 포항시 용흥동 353번지 운흥사(雲興寺)를 신축(新築)후 주지(住持)로서 30년간 재직하였고 기간중 60520일부로 기림사 주지서리(住持署理)로도 근무. 대웅전(大雄殿) 13, 요사(寮舍) 310, 산령각(山靈閣)을 신축하였고 석가모니불을 봉안

-1969.9; 민주공화당 경북 제6지구 국민투표 대책위원회 고문(顧問)으로 위촉

-1976.7; 대한불교 포항청년회 법사위원으로 추대

-1981.4; 새마을운동 활력화 추진을 위한 새마을지도자로 위촉

-1986. 11월 마지막날(음력); 세수 67세로 열반(涅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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