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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사랑

-나의 어머니(1924-2011)

by 운제산 구름 2024. 5.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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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1924-2011)

 

2011(辛卯) 10,

미수(米壽)의 세수(歲壽)로 육신(肉身)의 몸을 벗어버리고 저 세상으로 떠나가신 어머니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자식으로서 제대로의 효도를 못했다는 생각이 앞서기 때문이다. 어머니께서는 월성 김씨로 출생하시어 지난 1986년에 작고(作故)하신 나의 아버님을 만나 반세기에 가까운 삶을 부부(夫婦)의 인연(因緣)으로 살아오셨다. 아버님보다 25년의 세월을 더 사시다 돌아가신 셈이다. 선친(先親)과 함께 사시면서 나의 누님 한 분과 아들 3형제(兄弟)를 출산하셨다. 이제 부모님 두 분이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하니 인생무상(人生無常)을 느끼게 된다. 이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 부모님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오는 것은 불변(不變)의 진리(眞理)가 아닌가. 효도(孝道)에 대한 다음의 글이 생각난다.

 

수욕정이풍부정(樹欲靜而風不停)

자욕양이친부대(子慾養而親不待)

 

이 글은 의미는나무가 움직이지 않으려 하나 바람이 그치지 않고, 자식이 효도하려 하나 부모가 이 세상에 기다려 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 자녀(子女)들은 부모님을 정성을 다해 모셔야 함을 상기(想起)시켜주는 좋은 글이다.

 

또한 1950년에 납북(拉北)된 수필가인 청천(聽川) 김진섭(金晉燮)은 그의 수필집 인생예찬모송론(母頌論)에서 어머니를 아래의 글로 설명하고 있다.

 

 

어머니가 생존(生存)하여 계시는 동안 우리는 고요히 웃는 마음의 고향을 가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외로울 수 없으며 우리는 결코 어두음 속에 살 수 없습니다. 참으로 어머니는 저 하늘에 빛나는 밝은 별과 같이 순수(純粹)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아무것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피로부터 어머니의 정신으로부터 어머니의 진통(陣痛)으로부터 나온 까닭이올시다. 어머니는 우리의 뿌리인 것입니다. 어머니는 인간의 참된 조국(祖國)인 것입니다.(인생예찬, p.12)

 

보통의 어머니들과는 달리 나의 어머님은 스님이셨던 선친를 만나 30년이 넘는 세월을 절집 살림을 해 오셨다. 일반 사가(私家)와는 다르게 절집의 살림은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다. 이 세상을 떠난 영가(靈駕)들의 49재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불사(佛事)와 더불어 사찰의 가장 큰 행사라 할 수 있는 4월의 부처님오신 날, 7월의 백종(百種), 12월의 동지(冬至)등에는 많은 불자들이 절을 찾는데, 이 많은 신도들의 공양(供養)을 책임지는 분이 바로 공양주(供養主)인 나의 어머님이셨다. 이런 행사가 있을 때면 어머님께서는 1주일 전부터 불전(佛前)에 올릴 음식이며 신도들을 위한 음식등을 준비하기 위해 2km나 떨어져 있는 죽도 시장에 하루에도 두, 세 차례, 머리에는 과일이며 나물이 든 함박을 이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이런 어머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하지만 어머님 당신께서는 단 한번도 힘이 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이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해오셨다.

 

어린 시절에는 마냥 친구들과 노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던 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집안일을 자주 도와드렸던 일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남자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전부였는데, 뒷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는 일이며, 장작을 패는 일, 그리고 사찰 내부와 마당을 청소하는 일, 우물에서 물을 퍼 올리는 일, 그리고 재래식 화장실의 분뇨를 처리하는 일들이 대부분이었다. 이 당시에 나는 지게를 지고 나무를 하기도 했으며, 특히 화장실의 분뇨를 퍼내어 야산(野山)에 선친께서 심어놓은 과일 나무에다 뿌려주는 일이 가장 고역(苦役)스런 일이였다. 당시 분뇨는 똥장군이란 타원형의 원통에다 담아 지게로 나르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내가 대학생이 되었던 시절에도 가끔 하곤 했다. 분뇨를 나르는 일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데, 무엇보다 균형 감각이 요구되는 일이다. 잘못하면 똥물을 뒤집어쓰는 일이 있기 때문이다.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 그 당시의 일들을 생각해 보면, 비록 힘은 들었지만, 나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 마음 한 구석에 자리 잡는다.

 

나의 어머님께서도 그 당시의 모든 어머님처럼 어린 시절에 제대로 학교에 다니지 못하셨는데, 겨우 한글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당신께서 제대로 공부를 못하셨기 때문에 자식들에 대한 학구열(學究熱)은 은연중에 가지고 계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힘든 절집 살림을 하시면서도 자식들이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느 부모님과 같았다. 누나와 우리 3형제는 어머님의 보살핌 속에서 학창 생활은 큰 어려움 없이 마칠 수 있었고, 나와 남동생은 대구로 나가서 대학에 다닐 수 있었다. 어머님의 배려와 관심을 바탕으로 하여 남동생과 나는 학업에 전념하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 나는 영문학 박사가 되었고 교직에 있는 동생은 2011년 교원 인사에서 교감으로 승진하였다. 어머님께서는 돌아가시기 전에 막내 아들이 교감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셨다.

 

어머님께서는 타계(他界)하시기 전까지 3년 가까운 시간을 요양 병원에서 지내셨다. 자식들이 더 잘 봉양했다면 좀 더 오래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당신께서는 요양원에 계시면서도 항상 자식들의 걱정을 놓지 않으셨다. 나는 어머님께서 안과나 치과에 치료가 필요한 경우에 가끔 모시고 당신의 고통을 들어주려고 했다. 하지만 당신께서는 노환(老患)으로 항상 힘들어 하셨는데, 특히 다리에 힘이 없어 보행기를 비롯한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돌아가시기 전날의 모습은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며칠 전부터 평소 숨이 차는 천식 증상과 함께 폐염이 재발하여 중환자실에 계셨는데, 이번에는 내가 보아도 증상이 상당히 심각하였다, 담당의사께서도 호흡곤란이 평소보다 심하다는 말과 폐렴으로 합병증이 발생하여 산소호흡기에 의존하고 있다는 등의 소견을 내어 놓았다. 나는 형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요양원에 오도록 전화를 하고 부산에 계시는 누님에게도 어머님의 상태를 설명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연락을 취하였다. 의사들과 우리 형제들의 걱정을 뒤로 하고 어머님께서는 자정을 넘긴 이른 새벽에 유명(遺命)을 달리하였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25년을 더 사신 어머님의 장례를 정신없이 치루고 49재도 원만히 회향(回向)하였다. 이제는 생전의 모습을 다시 볼 수는 없지만, 지난 날 경주 기림사에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속에는 항상 웃고 계신다. 어머님, 지난 시절 힘들었던 모든 일 다 잊으시고 더 이상 고통(苦痛)없는 세상에서 잘 지내시기를 불효자가 엎드려 빕니다. 그리고 생전에 많은 분들에게 아낌없이 베푸셨던 그 공덕(功德)으로 왕생극락(往生極樂)하시기를 부처님전에 간곡히 발원(發願)합니다.(임진년을 맞으며)

 

 

 

-미수(米壽);여든 여덟살의 나이

-기제일(음력913)

-이 글은 대한불교진각종에서 매월 발간하는 신행지 법의 향기” 20125월호에 게재되었음.

-동생은 2018년 후반기 교원인사에서 교장으로 승진되었다,

 

 

 

 

조선중기 진묵(1562-1633)조사께서 모친상을 당하여 49재를 마치고 쓴 시를 여기에 적어본다. 스님께서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의 죽음을 애도(哀悼)하는 모습에서 지극히 인간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震黙祖師祭母文(진묵조사제모문)

 

胎中十月之恩 何以報也

膝下三年之養 未能忘矣

萬歲上更加萬歲 子之心猶爲慊焉

百年內未滿百年 母之壽何其短也

簞瓢路上行乞一僧 旣云己矣

橫𨥁閨中未婚小妹 寧不哀哉

上壇了下壇罷 僧歸各房

前山疊後山重 魂歸何處

嗚呼哀哉

 

태중에서 열달동안 품어주신 은혜를 무엇으로 갚을 것이며

슬하에서 3년동안 길러주신 그 노고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만세를 살고 또 만세를 사시더라도 자식된 도리는 오히려 부족하거늘

누구나 다 백세를 사는 시절에 백년도 못사셨으니

어머니 수명이 어떻게 그리 짧습니까?

발우하나로 노상에서 행각걸식하는 이 중이야 이미 그렇다 하더라도

규방에서 아직도 시집못간 누이동생은 어찌 슬프지 않겠습니까?

상단불공이 끝나고 49재도 마치니 대중은 자기 방에 돌아가고

홀로 남으니

앞산은 첩첩(疊疊)하고 뒷산도 중중(重重)한데 어머니 혼백은 어디로

돌아가셨습니까?

!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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