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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사랑

-나의 학창시절(學窓時節)

by 운제산 구름 2024.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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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학창시절(學窓時節)

 

5월의 온 산야(山野)를 흰 눈이 내린 듯 착각할 정도로 탐스럽게 하얀 꽃을 피웠던 아카시아가 끊임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오래 견디지 못하고 시들어버린 꽃들을 모두 지면(地面)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 했던가. 짧은 기간 동안 우리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해 주었던 아카시아의 빈자리를 6월의 꽃인 붉은 장미꽃들이 화려하고 소담스런 자태로 우리들의 눈을 즐겁게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들뜨게 해준다. 특히 도로 곳곳에 심어진 어여쁜 넝쿨장미는 오가는 운전자들의 시선(視線)을 끌어당기고 장미꽃이 지닌 특별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16세기 영국의 극작가이며 시인인 William Shakespeare(1564-1616)이 세상 그 어떤 것도 시간의 낫에 견딜 수 있는 것은 없다”(Nothing against Time's scythe can make defense)14행시인 소네트(sonnet)에서 적고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닌 인생이나 천지만물 모든 것들이 시간 앞에서 생멸(生滅)과 변화(變化)를 거듭한다는 의미이다. 나의 고향인 포항은 동해의 해를 맞이한다는 의미를 지닌 영일만(迎日灣)이 있는 곳이다. 내가 출생했을 당시의 포항은 작은 항구도시였다. 그러나 지금은 50만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거대 공업도시가 된 것이다. 이곳 향토출신 동화(童話)작가이며 소설가인 손춘익(1940-2000)선생은 지난 시절의 포항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포항은 워낙 형산강이 영일만으로 흘러드는 어귀의 삼각주로 형성된 지역이다. 말하자면 송도, 해도, 상도, 대도, 이런 삼각주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에 자연적, 인위적으로 서로 뭍으로 연결된 곳에 오늘의 포항이 건설되기에 이른 것이다.(손춘익 산문집, 코끼리의 코, p,49)

 

해도동과 상대동, 대도동 일대는 또 갈숲이 우거진 염전이었다. 갈숲에는 도요새와 비비새가 둥지를 틀고 습지 웅덩이에는 숭어떼가 득실거렸다. 소금막에서 피어올리는 소금 굽는 연기는 다 어디로 흩어져 가버린 것일까...그 습지와 갈숲과 염전을 깔아 뭉개고 아스팔트가 깔리고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고, 또 상가와 주택가가 밀집한 오늘이 이루어지리라고는 아마 꿈을 꾸지 못하였으리라.(같은 책, p.51)

 

선생의 말처럼 이제는 지난 시절의 전원적(田園的)이고 목가적(牧歌的)인 포항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60년 후반에 제철공장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이후부터 지난날의 아름다웠던 경치도 한 순간에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공장이 위치한 곳은 동촌지역으로 해변을 따라 더없이 깨끗했던 은빛 백사장(白沙場)이 길게 이어져 있었고 해송(海松)들이 빽빽하게 자리해 있었던 그야말로 청정(淸淨) 지역이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거대한 공룡처럼 자리 잡고 있는 공장과 수많은 굴뚝들을 바라보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슬퍼진다. 공장이 세워진 이후로 포항이 물질적(物質的) 풍요(豊饒)는 얻었지만 한때 아름다웠던 자연은 사라졌으며 고향사람들의 따뜻했던 인정(人情)은 찾아보기가 어렵게 되었고 정신적(精神的)으로는 오히려 더 피폐(疲弊)해진 듯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일까. 아래의 글들은 철없었던 초등학교에서부터 중, 고등학교, 그리고 처음으로 고향(故鄕)을 떠나 타향(他鄕)에서 보낸 대학 시절의 내 개인적인 체험과 특별히 나와 인연이 되었던 선생님들에 대한 추억을 회고해 본 내용이다.

 

-초등학교시절(1962-1967)

 

나는 초등학교를 생각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다름 아닌 할머니이다. 나의 어머니는 사찰(寺刹)의 힘든 살림을 혼자서 감당해 나가야 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언제나 바쁘게 지내다 보니 학교일에는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입학식이나 발표회 등 큰 행사가 있을 때는 항상 할머니께서 어머니를 대신해서 학교에 오셨다.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입학식(入學式)에 갔는데, 이 일은 내 마음 깊숙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리고 할머니께서는 동네의 잔치나 큰 행사가 있을 때에도 나를 위해 항상 떡이며 과일, 사탕 등을 내 몫으로 남겨 두어 내가 학교에서 돌아오면 먹으라고 내어 놓았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께서 나를 위해 먹을 것을 챙겨주신 일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려온다. 그리고 오래 전에 돌아가셨지만 할머니의 지극했던 나에 대한 사랑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부터 40년이 더 지난 나의 초등학교시절을 되돌아보면 즐거웠던 기억보다는 어둡고 쓸쓸했던 기억이 더 많은 것 같다. 나는 포항국민학교에 다녔는데, 학교는 서산(西山)이라고 명명되고 있는 산 아래 동쪽에 자리를 잡고 있었으며, 기차가 가끔 다녔던 철로 옆에 위치해 있었다. 우리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대략 2km정도의 거리였지만 어린 시절에는 너무나 멀게 여겨졌었다. 내가 입학했을 당시의 사진을 보면 영락없는 시골뜨기 그 자체인데, 머리는 짧은 까까머리를 하고, 신발은 검정고무신을 신고 있고, 교복처럼 생긴 검정색의 상의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시에는 교복이 없었는데 어째서 교복처럼 생긴 옷을 입었는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단정하게 보이라고 입었던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아니면 도시아이들처럼 옷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입을 수 있는 옷을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별히 기억나는 일들은 거의 없으나 부지런히, 성실하게 학교에 오갔던 일들만이 기억에 남아있다.

 

6년이라는 긴 초등학교의 재학기간 동안 여러 분의 담임선생님과 만났으나 지금 떠오르는 분은 1학년과 6학년 때의 두 분 선생님이 비교적 깊이 내 머릿속에 남아 있다. 선생님들의 실명(實名)은 알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 쓰지 않기로 한다.

 

처음 학교에 들어가 만났던 선생님은 여선생님으로 언제나 나를 포함한 어린 학생들에게 어머니같이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신 분이었다. 선생님과는 반대로 6학년 때의 남선생님은 좀 특별한 분으로 지금도 무섭고 엄했던 분으로 내 기억에 남아 있다. 다음의 일들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당시 선생님의 자택은 학교에서 어린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에 있었는데, 점심시간이 되기 1시간 전에 학생 2-3명에게 선생님의 집에 가서 도시락을 가져오게 한 일들이 여러 번 있었다. 선생님은 우리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점심을 드셨는데, 도시락을 먹는 방법이 좀 특별했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교실 앞쪽에 있는 교탁(敎卓)의 의자에 앉으셔서, 먼저 도시락을 열고 밥을 먹기 편하게 몇 등분으로 나누고 드시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선생님의 체구(體軀)는 어린 우리들이 보기에 매우 크셨기 때문에 입도 엄청 크게 보였으며, 그 큰 입으로 대략 6등분이 된 밥을 순식간에 반찬과 함께 드셨던 모습이 너무나 특이하게 보였다. 특히 선생님의 얼굴은 항상 술을 드신 것처럼 붉은 홍조(紅潮)를 띠고 있었고, 수업이나 훈시를 하실 때는 한쪽 손에는 항상 지시봉을 들고 계셨는데, 이 지시봉은 우리들에게는 공포 그 자체였다. 그 이유는 이 지시봉으로 매를 맞은 친구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선생님의 모습은 나의 초등학교의 시절을 다소 춥고 어둡게 생각하게 된 원인이 된 것 같다. 하여간 나는 6년의 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다닌 결과로 졸업할 때 6년 개근상(皆勤賞)을 받게 되었는데, 지금도 이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19682월 나는 포항초등학교 제49회로 졸업하였다.

 

-중학교 시절(1968-1970)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나는 지난 초등학교 때 겪었던 어둡고, 외로웠던 생각을 많이 떨쳐버리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가까이 지내게 된 친구들 덕분이었다. 우선 함께 지냈던 4-5명의 친구들이 있었는데, 종종 함께 어울려 지내는 시간이 많았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영일만 바다로 나가서 사진을 찍기도 하고 끊임없이 밀려오는 파도를 바라보며 우리들의 미래를 꿈꾸어 보기도 하면서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이들 친구들 중에는 지금 고향에서 변호사와 교수로 활동하는 친구도 있고 타지(他地)로 나가서 대기업의 최고 경영자가 된 친구도 있다. 나는 특히 넓은 동해 바다를 바라보는 것을 좋아하였다. 더없이 넓은 바다를 바라보면, 모든 것이 내 세상인양 착각(錯覺)이 들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높은 파도가 방파제(防波堤)에 부딪쳐 흰 포말(泡沫)을 일으키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곤 했다.

 

3년의 학교생활을 하면서 특히 1, 2학년 담임선생님에 대한 기억이 지금도 내 가슴속 깊이 남아 있다. 두 분 모두 영어를 전공하신 선생님이었다. 우연(偶然)의 일치인지 몰라도 두 분 선생님은 약간의 신체적 장애(障礙)를 지니고 계셨다. 1학년 때의 선생님은 한 쪽 다리가 불편하셨고 2학년 때의 선생님은 한 쪽 손에 장애가 있었다. 하지만 두 분은 교사의 사명감에서 우러나온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얼굴에는 미소(微笑)를 띠고 계셨으며, 밝고 긍정적(肯定的)인 생각을 지니고 계셨던 것으로 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외국어인 영어를 전공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반 과목과는 달리 영어라는 과목의 특수성이 두 분 선생님에게 개방적(開放的)이고 적극적(積極的)인 자세를 심어준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특히 2학년 때의 선생님께서는 나에게 운동을 하도록 기회를 주신 분이다. 당시 나는 신장이 그렇게 크진 않았고 학급에서도 중간 정도의 체격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야구와 핸드볼, 그리고 육상 부분에서 지역에서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나는 핸드볼부로 들어가게 되었고 학교를 대표하는 선수로 뽑히게 되었다. 내가 지금까지 건강을 유지하고 있는 것도 중학교 때 열심히 운동을 한 결과로 여기고 있다. 당시 우리 학교 핸드볼팀은 지역에서 최고의 팀으로 평가받고 있었으며, 포항지역을 대표하여 도민체전에 까지 출전하는 기회를 갖기도 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내가 좋아했고 함께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가 있었는데, 아쉽게도 학교 졸업 후 오늘 날까지 그에 대한 소식을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의 이름은 이일영 이었는데 소풍을 가서 찍었던 흑백사진 한 장만이 지금도 내 사진첩(寫眞帖) 속에 옛날 그대로의 모습으로 남아있다. 그는 중학교 재학중에 서울로 이사한 후 그곳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꼭 한 번 만나보고 싶은 나의 친구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학창시절 중 가장 행복했던 때는 다름 아닌 중학교 시절이었다고 생각된다. 19712월 필자는 포항중학교 제26회로 졸업하였다.

 

-고등학교시절(1971-1973)

 

고등학교 3년의 기간 동안은 열심히 공부한 것 이외에는 특별한 기억이 없는 듯하다. 내가 다닌 동지상업고등학교는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진학반과 은행과 취업을 목표로 한 취직반으로 나누어져 있었고 나는 진학반에 속해 있었다. 나는 비교적 열심히 공부한 덕분으로 학교 설립자인신 평보장학생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아래의 두 분 선생님은 많이 시간이 지난 지금에도 내 마음속에 깊이 남아 있다. 이 시기에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주셨던 분은 바로 3년 내내 담임을 하셨던 한동웅 선생님 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선생님은 바로 수필가이며 포항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하셨던 한흑구(1909-1979) 교수님의 장남이셨다. 선생님의 자유분방(自由奔放)하고 매사(每事)에 있어 적극적(積極的)인 태도는 학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한다. 선생님께서는 수업도 열심히 하셨고 특유의 화술(話術)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어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무엇보다도 선생님께서 취미로 주말마다 하는 바다낚시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주기에 충분했다.

 

내가 대학에서 영문과를 선택한 것도 사실은 나의 담임선생님들의 영향이 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중고등학교 6년의 기간동안에 중학교 3학년 때를 제외하고 모두 영어를 담당하셨던 분들과의 만남이었는데, 지금도 이 인연을 나는 소중하게 여기고 있다. 한동웅 선생님께서는 오래전에 모교의 교장으로 재직하신 후 퇴직하여 인생을 즐겁게 지내고 계실 것으로 여겨진다. 고등학교 시절에 내성적(內省的)이고 모든 일에 소극적(消極的)이었던 나는 선생님의 낙천적(樂天的)이고 낭만적(浪漫的) 성격(性格)을 항상 존경(尊敬)하였다.

 

국어를 담당하셨던 손춘익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선생님과의 첫 대면(對面)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 졌다. 3학년 2학기 때로 생각 되는데, 당시 나는 대학 진학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 무렵 나는 공군사관학교에 특차 지원한 적이 있었는데, 1차 관문인 필기시험에 합격하였다. 당시 선생님께서는 교지편집을 책임지고 계셨다. 선생님께서는 나를 불러 합격소감문을 쓰도록 요청을 하였고, 그래서 나는 내가 공부한 경험을 글로 쓴 적이 있었다. 이 인연은 지금도 내가 가끔 글을 쓰게 하는 계기를 제공해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포항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처음에는 아동문학가로 동화(童話)를 쓰기 시작하여 나중에는 소설(小說) 분야로 그 영역을 넓혀 나가신 분이다. 그리고 이 지역의 문단(文壇)을 주도해 나가신 분으로 많은 작품을 집필하셨다. 안타깝게도 지난 2000년 지병(持病)이 악화되어 삶을 마감하셨다. 돌이켜 보면,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그냥 바쁘게 대입시험 준비를 했던 기억이 대부분이며 나의 노력이 헛되지 않아서인지 몰라도 나는 대구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게 되었다. 나는 19742월에 고23회로 졸업하였다.

 

-대학시절(1974-1977)

 

고향과 부모님의 곁을 떠나 타향(他鄕)에서 내 스스로 생활을 하게 된 시기였다. 나는 학교 근처에 조그만 방을 얻어 자취(自炊)를 시작하였다. 대학 생활은 이전의 생활과는 여러모로 많은 차이가 있었는데, 무엇보다 모든 일을 스스로 해나가야 되는 점이었다. 학교공부나 개인생활에 있어 그 누구의 간섭을 받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특권(特權)을 누리는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였다. 내가 속해 있었던 영문과는 남, 여학생이 반반 정도였다. 처음으로 여학생들과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게 된 점이 처음에는 무척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강의실과 도서관을 오가면서 나름대로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해나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2학년 때에는 대외장학금을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는 군복무 문제로 고민하게 되었는데, 휴학(休學)하고 사병으로 입영하는 방법이 있었고 또 다른 방법은 예비역장교훈련단(ROTC)으로 지원하는 일이었다. 나는 학과 선배들의 권유에 따라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근무할 수 있는 학군후보생으로 지원하기로 마음을 정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후보생으로의 지원은 여러 가지로 내 인생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임관(任官) 후에 내가 군 생활을 하면서 장기복무를 하게 된 것도 대학시절에 후보생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지금도 나는 학군장교로 복무하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대학에 입학하여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느라 바쁘게 지내던 중, 5월경으로 생각되는데 축제기간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당시 축제의 한 행사로 신입생 환영 가요경연대회가 대명동캠퍼스에서 있었다. 평소 노래를 듣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나는 용기를 내어 가요부분에 지원하여 참가(參加)한 적이 있었는데, 운이 좋게도 내 노래가 입상(入賞)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학과친구들로부터 축하를 받은 일이 지금도 가끔 생각난다.

 

학군 후보생이 된 3학년부터 4학년까지의 기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게 지냈던 시절이었다. 대학 졸업과 장교 임관 두 가지 다 포기(抛棄) 할 수 없는 나에게 부과된 더없이 중요한 과제였었다. 학과 공부도 쉽지 않았지만, 무더운 여름방학 때마다 군부대에 들어가 훈련을 받아야만 했던 일은 정말 힘들었다. 나의 인내심(忍耐心)이 약해지려고 할 때 마다 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나에게 주어진 이러한 과정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갔다. 대학생인 동시에 후보생으로서의 두 가지 생활을 무사히 마치고 나는 782월에 졸업과 육군소위 임관이라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나의 대학생활의 전부는 바로 졸업과 임관 이 두 문()을 준비하는 시간이었고, 여러 가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쁘고, 활기차고 보람되게 보냈던 나의 청년 시절이었다.

 

지금까지 나의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 시절을 간략하게 되돌아보았다. 2008년은 내가 대학을 졸업한지 30년이 되는 해이다. 벌써 1세대의 시간이 지났다고 생각하니 세월이 정말 빠르게 느껴진다. 이제는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시절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소중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특히 초등학교 때 나의 손을 잡고 학교 입학식에 데려다주었던 할머니를 생각하면 할머니가 더욱 그립고 보고 싶어진다. 나의 할머니께서는 지난 19861월에 노환(老患)으로 돌아가셨다. 1888년에 할머니께서 출생하셨다. 2018년 지금 살아계신다면 세수(歲壽) 130살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오래전에 고인(故人)이 되셨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내 가슴속에 살아 계신다. 지금도 나는 할머니께서 생전(生前)에 항상 소중하게 간직하셨던 검은 색의 백팔염주(百八念珠)를 가지고 있는데, 할머니의 체취(體臭)가 담겨있는 이 염주를 볼 때마다 할머니의 다정(多情)했던 얼굴이 떠오른다.(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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