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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사랑

-나의 군생활 회고(回顧)

by 운제산 구름 2024. 6.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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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군생활 회고(回顧)

 

지난 931월말, 나는 그 동안 정들었던 군복무를 큰 허물없이 무사히 마쳤다. 대학시절 2년간의 후보생 기간을 거쳐 소위로 임관하면서 군문에 들어온 이후 령관 장교로 진급하여 적지 않은 기간을 복무하였다. 군 생활 중 나름대로의 어려움도 적지 않았지만, 이렇게 무사히 전역하고 나니 그 모든 것이 그리운 추억처럼 떠오른다. 내가 군복무 중에 경험했던 그 모든 일들을 다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내가 체험했고, 그래서 지금의 내 삶의 중추가 되고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마냥 고되게만 느껴지던 후보생 시절에서부터 소위로 임관한 후 처음으로 군복무를 시작했던 야전 근무, 그리고 학군단 근무를 거쳐 마지막 근무처가 된 3사관학교 교수부에서의 근무까지 그 모든 것이 내게는 소중한 체험들이었다.

 

후보생 시절

 

743월 영남대학교 영문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된 나의 대학 생활을 돌이켜 보면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는 내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쩌면 내게 있어 공부는 취미이자 특기였는지도 모른다. 그 때문이었을까 2학년 때는 대외 장학금 수혜자로 선발되는 행운을 얻기도 하였다. 그런데 2학년 1학기가 끝날 무렵, 나도 여느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군복무 문제로 고민하였다. 재학 중에 휴학하고 군에 입대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졸업한 후에 입대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바로 그 무렵 재학 중에도 병역의 문제를 해결하면서 동시에 졸업할 수 있는 학군단 제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나는 졸업과 동시에 장교로 근무할 수 있는 학군단 지원을 결심했고, 그래서 2년간의 고된 후보생 과정을 이겨내야만 했다.

여러 가지 절차를 거친 후, 학군 후보생에 선발되고 나서야 후보생으로서의 생활이 평소 생각했던 것보다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선 머리를 짧게 깎아야 했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나 학군단에서 정해준 단복을 입어야 했고, 그리고 선배들에 대한 깍듯한 예우도 익혀야 하는 등 이전의 대학 생활과는 여러 가지 점에서 달랐다. 그로 인해 나의 대학 생활은 상당히 위축되어 있었다. 당시 일반 대학생들을 부러워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특히 학과 공부와 학군단 교육을 동시에 해야 되는 빠듯한 대학 생활은 나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그리고 여름방학 중에도 군부대에 입소하여 병영훈련을 받아야 하는 일이며, 학군단 교육의 결산이자 장교로 입문하는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두 차례의 승급시험과 임관시험 등은 대학의 낭만을 남의 일로만 느껴지게 했다. 그러나 대학의 낭만이 어찌 젊음을 향유하는 것만 일 수 있는가? 스스로 자신을 어려움 속에 던져 넣고 단련시키는 것 또한 또 다른 의미에 있어서 젊은 시절의 낭만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나는 허물어지려는 내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후보생이 된 후, 집안 사정을 고려하여 자력으로 대학을 졸업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그 길은 매 학기 등록금을 지원해 주는 국방장학생으로 지원하는 것이었고, 나는 거기에 선발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장학금 수혜 기간만큼 더 근무해야 하는 강제의무가 주어져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일반 후보생보다 2년을 더 복무하기로 되어 있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내가 장기 복무하게 된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무튼 나는 힘들고 어렵다는 2년의 후보생 기간을 마치고 782월에 졸업과 함께 소위로 임관하여 군 복무가 시작되었다.

 

야전 근무

 

나의 야전 근무는 소위 임관 후 중위 진급 이후까지의 2년간의 비교적 짧은 기간이었다. 졸업과 임관으로 인해 들뜬 기분도 잠시, 곧바로 소대장 교육 기관인 육군 보병학교의 초군반(OBC)에 입소하여 소대장 임무 수행에 필요한 교육을 받았다. 그 기간 중 극기와 인내심을 기르기 위해 마련된 유격훈련을 생각하면 지금도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혹독했다. 길게만 느껴지던 4개월간의 훈련이 끝나갈 때쯤 훈련 동기생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배속될 부대 때문에 긴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 고된 훈련으로 악명이 높았던 특전사로 배속되면 어쩌나 하며 불안해하는 동기생들도 적지 않았다. 또 비교적 근무가 수월하다는 전후방 부대로 보직을 받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로 낙관하는 동기생들도 있었다. 지나고 나서 보니 당시 동기생들의 표정 하나 하나가 재미있는 추억처럼 떠오른다. 나는 2군 자원으로 분류되어 보병 제 35 사단 해안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그것이 나의 본격적인 군 생활의 시작이었고, 거기에서의 근무 기간은 1년이었다. 이듬해 중위로 진급하면서 훈련단 예하 예비군 관리대 인사장교로 보직을 옮겼다. 거기에서 근무하던 중 학군단 교관 요원을 선발한다는 공문을 보았다. 당시 연장 복무 중이던 나는 학군단 근무를 자원하였다. 다행히 교관으로 선발되어 모교 학군단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나의 군 생활 기간 중 야전 근무는 그렇게 해서 끝났다. 비록 2년이라는 짧은 기간의 야전 근무였지만 내게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생각하게 했던 시간이었다. 나는 그 근무 기간동안 무엇보다 야전 군인의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방에 대한 나름대로의 안보관을 갖게 된 시기이기도 했다. 또한 부하를 지휘, 통솔하는 지휘자로서의 어려움을 경험한 최초의 시기이기도 했다.

 

학군단 근무

 

학군단 근무는 802월부터 838월까지 36개월의 기간이었다. 내가 학군단 근무를 시작한 때는 791026일 사건의 여파로 805월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던 혼란의 시기였다. 그래서 내가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정부에서는 전국적으로 비상계엄을 선포하여 모든 집회활동이 금지된 살벌한 시기였다. 내가 근무하던 대학에도 계엄군이 주둔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학생들의 학교 출입을 봉쇄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한 시기에도 후보생 교육은 일정대로 실시되었다. 그리고 후보생들의 동요를 염려해서인지 상급 부대에서는 평소보다 더 철저한 교육을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고 했던가? 혼란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학군단 근무에 익숙해져 갈 무렵 내 마음속에는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공 공부에 대한 미련이 싹트기 시작했다. 나는 영문과의 옛 은사님들을 찾아뵙고 나의 이런 마음을 털어놓았고, 은사님들은 선선히 나의 대학원 진학을 허락하셨다. 군 복무와 함께하는 공부라 학군단 후보생 시절의 공부보다 더욱 힘들었다. 나의 노력도 노력이지만 은사님들의 크나큰 배려에 힘입어 나는 832월에는 석사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다. 이때 대학원에서의 공부는 나로 하여금 학문의 길로 방향을 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학군단에서의 근무 시기는 나의 인생에 많은 보람과 함께 변화를 가져다 준 전환기라 할 수 있다. 모교에서 후배들을 교육시켜 군의 간성으로 훈육했던 일, 그 기간 중 결혼한 일, 812월에는 아내가 건강한 두 아들을 순산했던 일, 그리고 중위의 박봉으로 대학원을 마칠 수 있었던 일 등으로 해서 그 기간은 필자의 인생에 가장 보람 있었던 시간으로 기억된다. 이것뿐만 아니었다. 그 기간 중 또한 학군단 행정과장으로 근무하면서 군대 행정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그리고 당시 대구지역 학군단이 3사관학교에 예속되면서 업무 협조 차 사관학교를 자주 방문하게 된 것은 내 인생의 또 다른 전환의 계기가 되었다. 그것은 838월에 3사관학교 교수부 영어과로 보직을 옮긴 사실이었다. 당시 영어과에는 영어교수가 부족한 상태였고, 나의 자격이 교수요원으로 적격하다는 점을 깨닫고 당시 교수부에 근무하고 있던 선배들의 조언을 듣고 교수부 근무를 결심하였다. 학군단에서 4년 가까운 기간을 근무하면서 후배들을 우수한 소대장으로 양성하기 위해 미력이나마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나는 후배들을 교육하면서 무엇보다도 학군단의 명예를 중시하고, 군대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제규정(諸規定) 이행과 솔선수범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모교와 학군단의 명예는 동일한 선상에서 이루어진다는 점과 함께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전통을 계승할 수 있도록 후보생들에게 당부하였다. 학군단 기간 중 인연을 맺은 후배 기수는 모두 4개 기수로, 학군 19기에서 22기까지의 후배들을 임관시키는 성과를 거둔 것은 무엇보다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있다.

 

 

 

3사관학교 근무

 

사관학교 근무는 교수부 영어과 교수요원으로 보직을 받은 838월말부터 931월까지 10년에 가까운 기간이었다. 이렇게 보면 나의 군 생활의 대부분은 여기서 보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그곳은 군인으로서 나의 마지막 근무처가 된 곳이다. 사관학교에서의 근무는 나에게 여러 가지로 유익하였다고 생각된다. 먼저 젊은 장교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그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그들의 고민을 알고, 나의 경험을 통해 그들에게 조언할 수 있었던 것은 가르치는 자의 큰 보람이었다. 또한 내게 어려움이 있을 때 함께 근무한 선배 교수님들의 조언과 격려는 나에게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위관 장교 시절에는 불가능한 것으로만 생각했던 영관 장교로 진급이 이 기간 사이에 이루어졌다. 그밖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못다한 전공공부를 마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고, 학교의 배려로 인접 대학에 출강하는 혜택을 받은 일은 나에게 더 없는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돌이켜 보면 나는 청춘(靑春)을 모두 군 생활에 바쳤다고 할 수 있다. 그 기간은 비록 엄격한 규율과 상하 질서의 체계로 많은 제약이 가해진 생활이었지만 내게는 어느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어쩌면 나의 인생은 그 기간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아내를 만나 두 아들을 얻게 된 일과 사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한 경험은 필자에게 잊지 못할 중요한 기억으로 남아있으며, 대학 강단에서 자신감을 갖게 해 준 원동력이 되어준 것은 다름 아닌 사관학교에서의 근무였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긴 시간에 비하면 군복무 기간은 그렇게 길지 않다 하더라도, 이 기간은 필자의 인생에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지난 군생활 중 여러모로 부족한 나에게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여러 선배님, 동료, 후배들에게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린다.

 

상기 내용은 대한민국 ROTC중앙회보에 게재된 글(76,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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