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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가족 큰 사랑

-나의 인생 70년

by 운제산 구름 2024. 4.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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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어지와 소나무

 

 

-나의 인생 70

 

중국 당()나라의 시인(詩人)인 두보(杜甫;712-770 AD)는 그의 시() “곡강”(曲江)에서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라고 노래했다. 여기서 나이 칠순(七旬)을 의미하는 고희(古稀)라는 말이 유래(由來)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수명(壽命)이 지금과는 달라 칠십을 넘기는 것이 매우 드물었다는 것을 이 시구(詩句)에서 볼 수 있다. 고려말 백운(白雲) 경한(景閑)스님(1299-1375)인생칠십세 고래역희유”(人生七十歲 古來亦稀有)라 하였다. 또한 춘추시대 노()나라의 정치가이며 사상가요, 교육자인 공자(孔子;551-479 BC)도 그의 나이 칠십에 이르러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欲不踰矩)라는 말을 하였다. 여기서 종심(從心)은 나이 칠십을 의미하며 그 뜻은 하고 싶은 대로 하여도 법도(法道)를 어기지 않는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주변의 이웃들에게 혹여 예의(禮儀)에 어긋나는 행동은 하지 않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앞으로 얼마나 더 살지는 모르겠으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 없이 조용하게 살아가고 싶다. 오늘날에는 사람들의 평균수명도 많이 늘어나 남.녀 모두 80세를 넘고 있고, 드물지만 백수(白壽)를 넘게 장수(長壽)하기도 한다. 내가 지금까지 큰 질환(疾患)없이 살아온 것도 행운(幸運)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여생(餘生)도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고 아내와 함께 건강하게 살고 싶다. 이제 이 나이가 되고 보니 내 자신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과거 삶을 되돌아보고 미래에 대한 나의 생각을 적어본다. 먼저 나의 뿌리라 할 수 있는 조부모님, 부모님에 대한 간략한 생사이력(生死履歷), 나의 학창시절(學窓時節), 내 삶의 든든한 토대(土臺)가 되어준 군복무와 결혼, 그리고 나의 작은 가족과 여생(餘生)에 대한 소망(所望)을 간략하게 피력(披瀝)하였다.

 

-나의 뿌리

 

세월이 지나 두보나 공자가 말한 칠순의 나이가 되어보니, 내 인생에서 많은 시간이 지나갔음을 깨닫게 된다. 먼저 나를 이 세상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신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한다. 훗날 나의 손자녀들이 이 글을 읽고 선대(先代) 조상들이 누구며, 어떠한 삶을 사셨는지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들도 우리 집안의 뿌리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기대해 본다. 나의 조부모님은 경북 영일군 동해읍 마산리 어촌에서 터전을 잡으셨다. 두 분께서는 슬하(膝下)에 나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 형제(兄弟)를 두셨다. 나는 생전의 조부님에 대한 기억이 없는데, 내가 출생하기 전에 고인(故人)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부님의 사진이라도 남아있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생전의 조모님의 말씀에 의하면 조부님께서는 체격이 건장(健壯)하셨다고 들었다. 그래서 인지는 몰라도 나의 아버님과 작은 아버지께서도 기골(氣骨)이 장대(長大)하였다. 조부님께서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어 조모님께서는 청상(靑孀)이 되어 두 아들을 양육하면서 힘든 삶을 살아오셨다. 나의 조모님이 1888년에 출생하셨으니, 조부님께서도 조모님과 비슷한 시기나 그 이전에 출생하셨을 것으로 본다. 나의 조모님은 무자년(戊子;1888/01/03)에 출생하시어 병인(丙寅;1986/01)에 사망(死亡)하시었다. 조모님은 노년으로 인한 기관지 질환으로 고생하시다가 생을 마치셨는데, 거의 백수(白壽)에 이르는 장수를 하셨다. 조모님은 손자인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나는 초중고 학창 시절을 할머니 방에서 공부를 하면서 보냈다. 초등학교 입학 때는 할머니께서 동행(同行)해 주신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학교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 항상 과자며 먹을거리를 내어주곤 하셨다. 할머니의 인자하신 모습과 손자에 대한 따뜻한 배려를 생각하면 내 가슴이 먹먹해진다. 돌아가신지 오래되었지만, 지금도 할머니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지금까지 간직하고 있는 소중한 할머니의 유일한 유품(遺品)은 검은 색의 108 염주(念珠)이다. 할머니께서는 이 염주를 평생 지니고, 돌리시면서 당신의 자식들과 손자녀들이 잘되기를 불철주야(不撤晝夜)로 기도하며 부처님의 가피(加被)를 염원(念願)하셨다.

나의 조부모님은 나의 손자녀에게는 고조부모가 된다.

 

나의 부친은 경신년(庚申;1920/06/25)에 출생하시어 병인년(丙寅;1986/12)에 지병(持病)으로 사망하셨다. 월성(경주) 김씨인 나의 모친은 갑자년(甲子;1924/02/28)에 출생하시어 신묘년(辛卯;2011/10)에 미수(米壽)의 나이로 이 세상을 떠나셨다. 나의 부친보다 20년 넘게 이 세상에서 계시다가 타계(他界)하셨다. 생전의 모친께서는 당시의 대부분의 노인들처럼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못하셨고 한글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였다. 당신의 배움에 대한 통한(痛恨)은 자식들을 통해 성취하셨다. 나의 동생은 중등학교장으로 퇴임(退任)하였고, 필자는 영문학 박사가 되었다. 부모님은 나의 손자녀에게는 증조부모가 된다. 지금 살아계신다면 귀여운 증손자녀의 재롱(才弄)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안타까울 따름이다.

 

지금의 나를 이 세상에 존재하게 해준 조부모님, 부모님에게 이 지면을 빌어 감사를 드린다. 뿌리가 깊은 나무는 세찬 바람에도 잘 견디어내는 것처럼 선대 조상님들의 음덕(陰德)으로 나의 두 아들과 자부(子婦), 그리고 손자녀들도 그들이 일상(日常)에서 처하게 되는 풍파(風波)를 잘 극복하여 건강한 삶을 살아주기를 기대한다. 지금 이 나이에도 조모님과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은 여전하다. 이분들이 없었다면, 나의 존재(存在), 두 아들과, 손자녀들도 이 세상에 출현(出現)하지 못했을 것이다.

 

-학창시절회고

 

나는 고향 포항에서 초중고를 다녔다. 지금 되돌아보면 12년이라는 짧지 않는 기간 동안 여러 선생님들의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보통의 다른 친구들처럼 유, 청소년기를 대과(大過)없이 보낸 것 같다. 지금도 내 마음속에 떠오르는 몇 분의 은사님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고 철없던 초등학교 1학년인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 선생님, 중학교 때에는 처음으로 영어라는 외국어 과목을 가르쳐 주신 두 분의 영어 선생님, 그리고 고등학교 3년 동안 영어를 재미있게 가르쳐 주신 나의 담임선생님을 잊을 수가 없다. 영어 선생님들과 인연(因緣)은 훗날 내가 대학에서 영문과에 입학하게 되는 직접적인 동기(動機)가 되었다.

 

1974/03월에 대구에 있는 영남대학교(지금은 경북 경산시에 있음)에 입학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고향과 부모님 결을 떠나 독자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영문과에 들어간 나는 4년간의 재학기간동안 영문학을 전공하신 교수님들에게서 수업을 들으면서 영문학에 대한 전공지식을 습득해 나갔다. 1978/02월에 졸업한 후, 더 공부하고자 하는 나의 희망은 훗날 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어 석사과정, 박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학위를 취득하여 대학에서 후학들에게 나의 지식을 전수(傳授)하게 되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학창시절은 초///12년을 포함하여 대학수학기간, 대학원 석사/박사과정, 그리고 박사학위준비기간을 더하면 무려 25년이 된다. 25년 학업의 결실(結實)이자 나의 최종적인 학문적 성과(成果)는 영문학 박사학위취득인데, 1995/08월에 나의 모교(母校)인 영남대학교에서 학위수여식이 있었다.

 

-군복무와 결혼

 

1978/02월에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학군장교(ROTC)로 소위 임관후 영관장교가 되기까지 적지 않은 기간을 복무하였다. 이 기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값진 황금기(黃金期)였다고 할 수 있다. 청년장교로 근무중 1979/07월에 아내를 만나 1981/11/01/일에 결혼하였다. 그리고 아내와 나의 사랑의 결실(結實)인 두 아들의 출생으로 가장(家長)이 된 것도 이 시기에 이루어졌다. 아내와 나는 두 아들의 양육을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이 지면을 빌어 두 아들을 잘 키워준 아내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야전에서 소대장과 인사장교로 근무후에 모교학군단에서 복무하면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전공 공부를 하기 위해 대학원에 들어가 수업을 받게 되었고, 1983/02/월에는 영문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게 되었다. 학군단 복무후에 사관학교에서 교수요원으로 근무하면서 1988/02/월에는 모교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공부를 계속해 나갔다. 그 후 1993/01/월에 전역하여 대학에서 강의와 연구를 하면서 박사학위논문준비를 하였다. 박사과정에 입학한 후, 힘든 수학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나의 논문이 통과되어 1995/08/월에 학위를 취득하였다. 돌이켜 보면, 군복무중에 나에게 일어난 일련의 일들 중에 가장 중요한 사건은 아내를 만나 결혼하여 두 아들을 얻게 된 일이다. 지금도 아내를 평생(平生)의 반려자(伴侶者)로 만난 일이 기적(奇蹟)처럼 여겨진다. 세월이 흘러 이제 두 아들도 모두 결혼하여 그들의 삶을 이어나가고 있어 대견하다. 이렇게 나의 지난 군복무와 결혼에 대한 일을 뒤돌아보니 세월의 빠름을 새삼 느끼게 된다.

 

-나의 가족과 여생(餘生)

 

조부모님, 부모님의 인연지덕(因緣之德)으로 나는 이 세상에 인간의 모습으로 존재하여 지금의 나이에 이르도록 무탈하게 살아왔다. 지난 시절 나와 아내와의 혼인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이어진 작은 가족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1981/02/14/에 두 아들의 탄생(誕生)으로 부모가 되었다. 아내는 사력(死力)을 다해 두 아이를 성공적으로 출산을 하였다. 출산시 힘들었던 아내를 생각하면, 지금도 내 가슴이 아프다. 두 번의 산통(産痛)을 견디어내야 하는 어려운 출산이었다. 당시 젊고, 건강한 몸을 지닌 아내 덕분에 두 아들을 얻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많은 하혈(下血)과 산통으로 정신을 잃은 아내는 곧 바로 수혈(輸血)과 함께 안정을 취하기 위해 회복실로 옮겨지게 되었다. 나중에 입원실에서 바라본 아내는 얼굴이 창백하여 바라보는 것이 고통(苦痛)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의식(意識)이 돌아왔을 때 아내는 자신이 두 아들을 출산했다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아내의 몸을 빌어 나의 분신(分身)인 두 아들이 출생한지 4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다.

 

두 아들은 나와 아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잘 성장해 주었다. 두 아들 모두 군복무를 마치고 복학하여 대학 4학년 때 자신들의 전공에 매진(邁進)하여 본인들이 원한 분야에 취업하게 되었다. 두 아들이 그들 스스로 자신들이 하고자 하는 일을 찾아 직장 생활을 원만하게 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내 마음이 든든하다. 아내는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립정신(自立精神)을 갖도록 훈육(訓育)해 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아내의 교육 방식이 두 아들의 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듯하다. 장남은 2017/12/02/에 혼인하여 2018/무술(戊戌)에 손자 윤석(尹晳), 2020/경자(庚子)에 손녀 윤하(允荷) 두 남매(男妹)를 낳아 육아(育兒)를 하고 있다. 작은 아들도 2019/04/20/에 평생을 함께할 배필(配匹)을 만나 결혼을 하였고, 둘째 며느리도 2022/임인(壬寅) 8월에 손자 강림(姜林)을 낳아서 우리 부부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두 아들이 그들의 사랑하는 배우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어 살고 있는 것을 보면 감개무량(感慨無量)하다. 더구나 그들의 자식(子息)인 나의 손자녀를 낳아 후대(後代)를 이어가고 있어 고마울 따름이다.

 

이제 나도 나이가 들어 지금까지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많지 않게 되었다. 여생(餘生)도 사랑하는 아내와 지금처럼 건강하게 살아가고 싶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후회되는 일이 없지는 않지만, 인생의 종점(終點)에 와서 후회되는 일들을 생각해본들 다 소용없는 일이다. 내가 바라는 말년(末年)은 탐욕(貪慾)을 버린 지족안분(知足安分)의 삶을 살고 싶다. 그리고 손자녀들이 건강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들이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할아버지가 되고 싶다. 또한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는 고향의 형산강과 푸른 영일만을 바라보면서 여생을 보내리라 다짐해본다. 나는 중.고등학교시절부터 영어에 관심이 많아, 대학 때도 영문과에 들어갔고, 대학원 석.박사과정을 마치고, 평생 영어를 가르치면서 지내왔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나는 영어로 된 노래에 일찍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금 이 나이에도 가끔 기타(guitar)를 치면서 나의 팦애창곡을 부르곤 한다. 최근에는 그동안 틈틈이 녹음해둔 노래를 이동형 usb에 녹음(錄音)하여 듣는다. 젊은 시절의 힘있고 생동감(生動感) 넘치는 목소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듣기에 그렇게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나는 주변으로부터 고립(孤立)되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고독(孤獨)을 즐기는 편이다. 고독이 내 가슴에 다가오면, 내 나름의 해소(解消) 방법이 있다. 그것은 바로 평생 나의 반려자(伴侶者)인 책()을 읽기도 하고, 내가 좋아하는 팦음악을 듣거나, 가끔 나의 생각을 글로 표현하는 것이다. 나는 자연(自然)을 좋아한다. 하늘에 떠있는 구름을 바라보는 것도 좋고, 많은 초목(草木)이 우거진 야산(野山)과 푸른 영일만을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얼마 전부터 내 자신의 건강을 위해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였다. 자전거는 페달을 밟을 힘이 있을 때까지 탈 수 있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80-90의 나이에도 가능한 운동이 될 수가 있다고 한다. 나는 시간을 구속(拘束)하는 동호회에 가입하지 않고 내 방식대로 시간에 구애(拘碍)됨이 없이 자유롭게 타고 있다.

 

나의 집 거실(居室) 액자(額子)에는 유란원형”(幽蘭遠馨)이라는 글씨가 있다. “그윽한 난초의 향기(香氣)는 멀리까지 퍼져나간다는 의미이다. 남에게 폐해(弊害)를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보다는 난초에서 나오는 향()처럼 이웃에게 선행(善行)을 베푸는 사람이 되었으면 한다. 나는 두 아들과 손자녀들도 살아가면서 그들이 속한 사회와 조직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착한 인간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지난 70년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직,간접으로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떠오른다. 때로는 힘들고 어려운 일도 있었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들도 있었다. 지금 이 나이가 되기까지 변함없이 내곁에서 아내로서의 품위(品位)를 지키며 가정의 대소사(大小事)를 잘 챙겨준 집사람에게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운명처럼 아내를 만나 살아온 지난 시절이 이제는 과거지사(過去之事)가 되어버렸다. 앞으로의 남은 여생도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운명(運命)이 허락된 날까지 매사(每事)에 감사하며 살아가리라 다짐해 본다. 그리고 지난 세월(歲月)동안 혹여 나의 잘못된 언행(言行)으로 인하여 마음에 상처를 받으신 분들이 있다면 이 지면(紙面)을 빌어 사과(謝過)의 말씀을 드린다.(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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